갑오년에 다시 듣는 동학혁명의 메아리
[#올해는 갑오년이다. 근대 역사에서 가장 큰 소용돌이였던 동학혁명이 발발한지 2주갑 되는 해이다. 120년 동학군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전 근대 왕조사회에서는 무기를 들고 관에 대항하는 것 자체가 삼족이 멸하는 역적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농사짓는 천직을 팽개치고 죽창과 낫을 들게 하였을까? 동학과 관련된 성지들을 답사하며 그 당시 동학군의 외침을 다시 들어보았다.
아! 우금치
저 고개 마루에 서면 후천 세상이 보일 것 같았다. 저 고개만 넘으면 공주를 거쳐 한양까지 한달음에 다다를 것 같았다. 한양에 입성하여 나랏님을 어지럽히는 악간惡奸의 관리를 축출해서 국정을 맑히고 일본군을 물러나게 한다면 사내 대장부로서 이보다 보람된 일이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의기가 솟구친다. 돌쇠는 갑오년 1월부터 부지런히 전봉준 장군을 따라 다녔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눈빛과 바위같은 목소리에 대번에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무엇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그 마음에 감동하였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갑오년 1월 10일,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기를 나누어 가졌다. 물론 일말의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돌쇠 역시 대대로 농사를 짓는 양민이었다. 피땀 흘려 농사지은 곡식이 악랄한 지주나 탐관오리의 손아귀로만 들어간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이대로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것이 더 나을 성 싶었다. 황토현에서 승리를 거두고 연이어 관군을 격파하며 용기백배하였다. 가는 곳마다 탐관오리들을 쫓아내고 곡식을 풀어 사람들을 구휼해 주었다.
드디어 4월 27일 새벽,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정말 새 세상이 온 듯 싶었다. 전주화약 이후에는 돌쇠도 여느 농민들처럼 다시 농사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한번 점화된 정의의 불길은 돌쇠를 평범한 농부로 살게 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다시 죽창을 들었다. 물론 동학의 가르침도 좋았다. 앞으로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세상이 뒤집어져 상놈의 세상이 된다! 천주님을 모시게 된다! 정말로 믿고 싶은 소식이었다. 아니 팍팍한 현실에서 믿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돌쇠는 ‘개벽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현실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는 전 장군의 말에 마음을 굳히고 봉기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우금치 고개는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다. 처음 한두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는 대사에 따르는 노고쯤으로 생각했다. 좋은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조금의 희생은 마중물처럼 필요한 법이다. 돌쇠 역시 필요하다면 충분히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서의 패배가 잦아지자 겨울날 이른 해거름처럼 불안한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동학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40~50차례 전투를 하고도 그들의 1/10도 되지 않는 관군과 일본군 연합을 꺽지 못했다. 200여명의 일본군들, 그들은 무기부터 달랐다. 동학군들은 대부분 죽창을 들고 있었고 기껏해야 칼, 창, 활 등이었다. 일부 농민군은 재래식 화승총을 가졌으나 사거리가 100보 정도로 일본군 소총의 10분의 1도 안됐다. 일본군의 연발식 소총은 1초에 1발을 발사할 수 있으나, 화승총은 한발을 발사하는데 30초가 걸렸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돌쇠는 동료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주위는 시산혈하尸山血河. 어느 순간 돌쇠도 총에 맞았다. 잠시 혼절했다 깨어보니 주위는 온통 핏물로 흥건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이 잠에 빠져들 듯 아득해져갔다.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과 저승에서도 함께한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돌쇠의 눈앞에 인생의 여러 장면들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마지막에 고정된 모습은 어릴 적 고향집. 부모님과 형제들의 모습이 보이는 고향집으로 다가가면서 돌쇠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돌쇠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동학군의 심정을 짐작해보았습니다_편집자주)#]
초겨울 추위가 제법 매섭다. 우금치 고개를 걸어서 넘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다. 우금치 고개는 동학군들이 죽어서라도 넘고 싶은 고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고개를 넘지 못했다. 그들은 우금치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세상을 개벽시킨다는 동학군의 신심 역시 무너졌다. 냉엄한 현실은 겨울추위와 함께 그들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이후 관군들은 사냥몰이 식으로 동학군들을 남도의 구석으로 몰아갔다.
혁명의 발원지 고부
공주에서 한 시간 30분 정도 달려가면 남도의 평원이 펼쳐진다. 여기 고부는 지평선이 저 멀리 아득히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온 사방에 하늘과 그만큼 넓게 펼쳐진 평야뿐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땅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땀을 흘린 만큼 수확이 나왔다. 어떤 속임이나 복잡한 번뇌가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순민들의 세상이다. 이렇듯 평온한 곳에서 근대 동양 삼국을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혁명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먼저 말목장터로 향했다. 혁명의 첫 시발점이 이곳 말목장터이다. 1893년 계사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등 20명은 죽산마을 송두호의 집에 모여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봉기를 모의하였다. 사실상의 혁명의 시작이다. 잠시 숨고르기를 하던 혁명은 조병갑이 익산군수에서 고부군수로 재부임해오자 역사에 길이 남을 ‘짧지만 긴 대장정’을 시작한다.
드디어 갑오년 1월 9일 저녁, 풍물패가 분위기를 선동하자 사람들은 말목장터 감나무 주위로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감나무 아래서 정부의 실정과 조병갑의 죄를 신랄하게 성토하였다. 당시 고부는 큰 고장이었다. 지금이야 정읍의 한 면에 불과하지만, 1894년 당시에는 드넓은 배들평야(이평)에서 나오는 쌀과 함께 줄포, 염포 등 주변 포구에서 들어오는 물산이 집합했던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니 당시의 말목장터는 고부에서 가장 붐비고 유동인구가 많았을 터다. 그날 전봉준 장군의 연설을 가장 가까이서 들었을 감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에 쓰러져 지금은 황토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존처리한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그 자리에는 새 감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정조대왕 서거 이후 조선왕조는 그야말로 무능과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위정자들에게 고루한 유교의 도덕률은 서로 정권을 빼앗고 뺏기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관직은 목민牧民의 수단이 아니라 착복着服의 도구로 전락했다. 탐관오리들은 갖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갔고 양반들도 토색질에 여념이 없었다. 밖으로는 일본이 개항을 강요하고 들어와서 서서히 침탈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정치를 농단했고 경제를 종속시켜 나갔다. 서구 열강들 역시 힘겨루기 속에서 약소국의 이권을 빼앗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백성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난리를 노래불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며 곳곳에서 단말마로 민란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의 수많은 민란들이 올바른 방향과 지도자가 없어 채 빛을 발하지도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세상을 뒤바꿀 사상과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즈음에 동학이 창도되고 전봉준이 나타난 것은 역사의 운명이라 할 만하다. 고부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씨는 동학과 전봉준을 통해 요원의 불길처럼 삼남三南에 타올랐다. 상제님께서도 “전명숙은 만고의 명장이라 백의한사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느니라” 하셨다.
전명숙 장군의 묘소에서
우리는 전명숙 장군의 고택과 묘소가 있는 이평면 조소마을을 찾아갔다. 말목장터에서 차로 10여분 달렸을까. 남도의 여러 마을처럼 평화로운 조소마을이 나타났다. 전봉준과 그의 가족은 고부농민봉기 몇 해 전에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한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농사일과 서당을 운영하며 가난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 단출한 초가 두동을 돌아보며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옆집 촌로에게 물어보니 전 장군의 묘소가 근처에 있다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답례로 책자를 선물로 주고 역사적인 현장에 온 기념으로 삼았다.
고택에서 3~4백m 떨어진 길가 야트막한 언덕에 전 장군의 묘소가 있었다. 묘소 앞에 ‘갑오민주창의통수甲午民主倡義統首 천안전공봉준지단天安全公琫準之壇’ 이라는 묘지석이 보인다. 묘소 옆에는 사적비와 갑오년 창의문을 비석으로 세워 놓았다. 이밖에도 전 장군의 시와 몇 편의 글도 볼 수 있었다. 창의문倡義文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 뜻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 금일의 광경은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그 업에 안착하여 다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함께 임금의 덕화를 입게 된다면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노라’
이런 그에게 조선 조정은 ‘역도의 수괴’라는 죄목을 달고 효수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과연 그의 원통함이 어떠했을까? 만약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다면 문무를 겸전한 그의 재능으로 보아 국가를 경영하는 큰 동량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불우한 시대는 결국 그를 혁명의 길로 내몰았다.
상제님은 고부에서 이름난 신동이었고 전 장군 역시 고부에서 비범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으니 서로가 소문으로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상제님은 성수 스물넷이요 전 장군은 마흔 살이었다. 전 장군은 상제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왜 전봉준 장군은 상제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은 부질없다. 그 답은 ‘때가 아니라’는 상제님의 말씀 속에 있다. 전봉준은 죽어서야 상제님을 알아보았다.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의해 조선명부대왕이요 구원의 남조선 배 도사공으로 임명된 것이다. 천상에서나마 천하사에 동참하고 있으니 그 한이 어느 정도는 풀렸으리라.
우리는 전 장군의 묘소 앞에서 간단한 심고를 올렸다. ‘전봉준 장군님과 30만 동학군이시여. 시천주 주문을 외우며 후천 세상을 그리워하며 죽어간 당신님들은 저희들의 신앙 선배이옵니다. 이제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의 참동학 일꾼들에 의해 그 역사의 한이 풀리는 때가 왔습니다. 천상에서 신명으로나마 저희들과 함께 새 역사 개창에 매진하시어 그 원통함을 푸소서.’
겨울 해는 빨리 떨어져 벌써 사방이 어둑해졌다. 눈발이 날린다. 서둘러 차를 몰았다. 내년은 갑오년이다. 그 옛날 동학군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 올라오는 길에 눈발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쏟아졌다. 갑오년을 알리는 상서로운 눈이다.
■참고자료
김삼웅, 『녹두 전봉준평전』, 시대의 창
김철수, 『전봉준장군과 동학혁명』, 상생출판사
▲자료제공: 동학농민혁명기념관(정읍)
전명숙이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킴
1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 사람 전명숙(全明淑)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난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으니라.
2 일찍이 전명숙은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부터 3년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흥선대원군을 만난 일이 있더니
3 대원군이 명숙의 뜻을 물은즉 “제 흉중(胸中)에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오.” 하고 대답하니라.
거사를 만류하심
4 증산께서 명숙과 나이 차이는 많이 나나 일찍부터 교분이 있으시더니
5 갑오년에 하루는 명숙이 찾아와 말하기를 “내가 민생을 위해서 한번 거사를 하려 하니 그대가 나를 도와주시오.” 하거늘
6 증산께서 그 전도가 이롭지 못함을 미리 아시고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 하시며
7 “성사도 안 되고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 하고 경계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431~7)
(월간개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