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문화의 구성원리' (독후감)
(우실하 지음, 소나무, 1998)
(중략)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문화의 원형, 그 구성 원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전통을 논하는 글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리고 틈틈이 읽어 본 글들도 막연히 복고주의를 조장하거나 무턱대고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경향이 짙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어떤 이는 샤머니즘을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불교와 유교를 말한다. 어떤 이는 민족 종교(증산교, 동학)를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비록 이런 종교들이 우리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도리어 우리의 정체성을 더 혼란케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들을 관통하는 한국 문화의 원리가 무엇인가?
최근에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쓰여진 책 한권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소장 학자 우실하(禹實夏) 씨가 연세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논문을 기초로 하여 펴낸 책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332쪽)가 곧 그것이다. 사회학으로부터 출발한 그가 전통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 조사를 기초로 하여 내어놓은 결론이 무척 흥미롭다. 그의 전통 문화 읽기의 출발점은 "인간의 인식은 이해의 전구조(前構造) 안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가다머(Gadamer)의 "해석학적 원리"에 있다. 모든 문화는 그 형성 토대로서 구성 원리, 문법, 사유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음양론(陰陽論)으로 습합된 역사상(易思想)이다. 역사상 또는 음양론은 약 1만년 전 중국의 화남 지방에서 시작되어 화북 지방으로 전파된 농경 문화를 토대로 하여 주 나라에서 완성된 2수의 분화(1=道·太極→2=陰陽→4=四象→8=八卦→64=64卦)를 특징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삼신 사상(三神 思想) 또는 삼재론(三才論)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가장 깊은 사상의 뿌리인 동북방 샤머니즘과 태양 숭배사상과 연결된 것으로서 수렵 문화를 토대로 하는 3수 분화(0=無→1=道→3=三神·三才→9=3×3→81=9×9)를 특징으로 한다.
나머지 하나는 음양 오행론(陰陽 五行論)이다. 5수, 곧 오행(五行)이 중심이 된 이 사상은 농경 문화의 "2수 분화의 세계관"과 북방 샤머니즘의 "3수 분화의 세계관"이 산동 반도와 요동 반도를 잇는 발해만 지역에서 만나면서 전국 시대에 완성된 사상 체계이다. 이 세 가지의 세계관은 최소한 2,000년 이상을 지속하면서 우리의 전통 문화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구성 원리는 중국, 한국, 일본 등 이른바 한자 문화권 또는 유교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지형적 특성, 곧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나뉘는 동서의 지역 특성, 계급 분화와 맞물린 권력 관계, 통치의 상징 체계로 수용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격과 사회적 토대 등의 요인이 맞물리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의 구성 원리가 완성되었다. 백두대간의 서쪽인 고구려 지역에서는 음양 오행론이 정복 문화로 전파되어 삼재론을 밀어낸 결과 "음양 오행론 중심의 삼재론"이 문화의 구성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백두대간 동쪽의 신라 지역은 삼재론이 음양 오행론을 통제하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을 문화의 구성 원리로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한국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이 되었다.
저자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을 통해서 한국 전통 문화를 구체적으로 해독한다.
1. 훈민정음의 원리: 훈민정음의 자음은 5행에 해당하는 5개의 기본 자음(?:木, 遁:火, ?: 土, 걁: 金, 둁:水)에 획을 더하여 만들어졌다.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상징하는 ·(天), ?(地), ?(人) 3개의 기본 모음이 역사상의 기본 도상인 하도(河圖)의 원리에 의해 조합되었다. 그리고 초성(天), 중성(人) , 종성(地)도 삼재론에 입각해 있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음양론, 오행론, 삼재론이 정교하고 치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동양의 사유물이다.
2. 길조어(吉兆語)와 흉조어(凶兆語): 한국의 속담 중에서 3수를 기초로 하는 말이 상당히 많다. 한국의 민속에서 2, 4, 5수가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3. 시조(時調)의 삼장논리(三章論理):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6구 12분절로 구성된 시조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정형시이다. 중국의 5언 절구나 7언 절구는 모두 기(起)·승(承)·전(轉)·결(結)의 4행으로 되어 있다.
4. 삼태극(三太極):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음양이 교차된 태극(太極)이 주로 사용되지만, 천지인 삼재를 나타내는 삼태극이 널리 쓰이는 곳은 한국 밖에 없다. 향교나 서원의 대문, 북이나 장고, 종각이나 비각, 능의 홍살문, 왕궁이나 사찰의 돌계단 등 일상 생활용품 할것 없이 모든 곳에서 삼태극이 발견된다.
5. 전통 음악: 동양 악기의 형태, 줄의 수, 장단, 박자, 5음계 등 모든 것이 음양 오행, 삼재론 등의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6. 화랑도: 화랑도의 기본 세계관도 3수 분화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유, 불, 선 삼교를 화통하고 있다.
7. 사찰의 삼신각(三神閣), 삼성각(三聖閣): 한국 사찰의 대부분은 부처를 모신 대웅전 외에도 삼신각 혹은 삼성각을 모시고 있다. 삼신은 본래 산신, 칠성, 용왕인데, 세 신을 인격신으로 나타내면 호랑이를 탄 산신령, 봉황새를 탄 칠성, 거북을 탄 용왕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불교는 무교(巫敎) 혹은 신교(神敎)의 탈을 쓰고 있다.
8. 민족 경전과 민족 종교: 민족 종교의 경전으로 취급되고 있는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은 3수 분화의 세계관을 가장 핵심으로 삼고 있다. 천부경은 "하나는 없음에서 시작되며, 시작된 하나는 셋으로 쪼개어져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로 시작되어 우주적 완성수인 81(9×9)자로 되어 있다. 또한 천지인(天地人)을 각각 1(天), 2(地), 3(人)에 배당하여 삼극(三極)으로 삼고, 모든 수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천부경은 3수 분화의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삼일신고에서도 없음(無)에서 일기(一氣)가 나와서 삼극(三極)으로 나뉘고, 이것이 곧 삼신(三神)이니, 삼신은 바로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신이라고 보고 있다. 천부경은 "하나는 곧 셋과 같고 나뉘어진 셋은 곧 하나로 돌아온다"라는 논리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증산교의 경전인 도전(道典)도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三神)은 곧 일신(一神)이요, 우주의 조화신이니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한국의 문화를 중국 문화의 변방으로 취급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공박하고, 우리 나라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문화적 독자성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고유한 논리의 가능성은 3수 분화의 세계관에서 발견될 수 있다. 비록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후대에 쓰여진 위서(僞書)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한국인의 고유한 사유 체계와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동양 문화의 텍스트를 동양의 세계관을 통해 읽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동도동기론"(東道東器論)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국 문화의 특성이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더 세분하여 "한도한기론"(韓道韓器論)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 공유하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동도동기론, 한도한기론으로의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불가능하고, 이것이 전제되지 않을 때, 서양 문화의 비판적 수용과 전통 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구호는 한낱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는 물론 전통 문화의 복권을 바라는 사람이지만, 독자를 새로운 질문 앞에 세운다. 1. 불교, 성리학, 천주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서로에게 어떤 변형이 이루어지는가? 2. 전통 문화를 구성하고 변형시켜 왔던 세계관의 구성 요소나 한국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가 현재의 우리 문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2. 이러한 것들이 현대의 문화에서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 박제화된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어떤 역사 과정을 통해서 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는가?
특히 본인에게 예리하게 다가오는 질문은 전통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만남 혹은 상호간의 창조적 융합에 관한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서양 문화는 2대 원류, 즉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부터 생성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대인의 유목 문명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신중심적, 초월적, 영적인 성향을 지닌다. 그 반면에 헬레니즘은 그리스인의 농경 문화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인간중심적, 합리적, 현세중심적 성향을 지닌다.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에서 발원하였지만, 헬레니즘과의 만남 혹은 대결 속에서 독특하게 발전되어 왔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학도 헬레니즘 중심적 신학(합리적, 인간중심적, 현세적 신학)과 헤브라이즘 중심적 신학(영적, 신중심적, 미래지향적 신학)으로 구분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중략)
여하튼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라는 작은 책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 문화를 제대로 읽는 눈을 뜨게 되었음을 고맙게 여긴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기독교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매우 기쁘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두 인격, 즉 한국인과 기독교인이 서로 갈등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짜릿한 흥분을 일으킨다. "하나님은 나를 한국인으로 만드셨고, 또 한국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되게 하셨다"는 고백을 이제부터는 서슴없이 해도 되겠다 싶다. "기독교의 한국인이 되지 말고, 한국인의 기독교가 되라"는 이광수 선생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 것도 이 책 때문이다. 독자의 일독을 권한다.
글: 성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