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여성이 후천 세상의 주역 - 해월 최시형 평전
뱃속의 아이도 한울님
해월이 직접 지은 <내칙(內則)>은 동학의 태교(胎敎)가 담겨 있다. 해월은 모실 ‘시(侍)’의 모심의 순간을 생명이 포태할 때부터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어머니 뱃속의 아이도 한울님으로 보았다. <내칙>은 시천주(侍天主)에서 발현한 생명 사상에서 비롯됐다. 태아를 잉태한 어머니가 한울님을 봉양하는 양천주(養天主)의 자세로 열 달 동안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잘해서 기운이 맑고 체도도 바른 아이를 낳도록 권장했다. 그러면서도 내칙에서는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의 건강에 대해서도 잊지 않았다.
해월은 <내칙>에서 먼저 어머니가 먹거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먹거리 가운데 고기와 같이 기운이 탁(濁)한 종류를 피하라고 했다. 임산부의 기운이 맑아야 태아의 기운도 맑아 총명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면서 고기는 탁한 음식으로 태아와 어머니의 건강을 해치니 삼가라고 했다. 다음으로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했다. 임산부의 행동 하나하나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당당하게 행동하고 음식 하나를 썰더라도 반듯하게 썰어 먹는 태도를 가지라고 했다. 이어서 마음가짐도 중요하다고 했다. 화를 참고 남의 눈을 속이지 말고 남의 안 좋은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는 등의 마음가짐과 말조심을 잘 하라고 당부했다. 넷째, 힘든 일을 삼가라고 했다. 무거운 물건을 함부로 드는 등 힘든 육체노동이 어머니와 태아에게 좋지 않다고 했다. 어머니의 포태 기간은 새로운 생명인 한울님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했다.
당시 태교는 상류 양반층들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민중들에게 태아 교육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임산부라고 해서 특별히 존중하고 보호하려는 의식 자체가 없었다. 해월의 <내칙>은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던 민초들을 위한 태교였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임산부가 열 달 동안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갖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면 문왕과 같은 성인, 공자와 같은 성인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해월은 제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부인과 며느리에게 이를 실천하라고 했다. <내칙>과 <내수도문>을 집안에 던져두지 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주어 부인들이 외울 수 있게 하라고 시켰다. 이는 베를 짜는 서택순의 며느리를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짠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해월의 태교관에 대해서 경기대학교 조극훈 교수는 <생명철학의 관점에서 본 동학의 여성관>에서 “이는 포태 속의 아이도 한울님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마음가짐과 행동을 조심해야 되는데 이는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해월의 태교관은 태아를 한울님으로 모시고 살려야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생태적 태교의 바탕이 되었다.”라고 하면서 해월의 <내칙>은 오늘날 생태적 태교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여성이 개벽(開闢)의 주인공
내칙.내수도문 기념비. 기념비는 내칙.내수도문의 반포 백주년을 맞은 1990년 천도교여성회에서 주관해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용호리 복호동 무릉천변에 세웠다. 김창준의 집은 현재 터만 남아 있다. 위치는 작내로 331-26의 축사 왼쪽 언덕 위이다.
<내칙>이 태교에 관한 글이라면 <내수도문(內修道文)>은 내수도, 즉 부인의 수도를 장려하는 글이다. 해월은 오랜 도피 행각 속에서 민초들의 삶을 직접 지켜보았다. 해월의 눈에 비쳤던 당시 여성들은 성리학적 가치 질서 속에서 끝없는 차별을 받으며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해월은 여성도 한울님을 모신 존엄한 존재이기에 남성과 똑같이 한울님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내수도문>은 이러한 해월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내수도문>을 통해 여성 스스로가 시천주를 모신 존엄한 존재임을 스스로 깨닫고 일상생활에 충실한 것이 최고의 수도이며 수행이라고 해월은 강조했다.
<내수도문>은 7조목으로 되어있지만 크게 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우선 효(孝)와 공경(恭敬)으로 집안을 잘 다스리고 대인접물과 위생적인 생활에 대한 내용이 있다. 다음으로 일상적 수행인 심고(心告)를 생활화해서 생활 속에서 도를 닦으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알고 밥 짓는 공간인 부엌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라는 내용이다. 해월은 부인을 집안의 주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부인이 가내를 화순하게 하고 일상생활에서 지키고 실천해야 할 조목들을 <내수도문>에서 강조했다. 해월의 내수도문은 동학의 시천주 사상을 바탕으로 여성 스스로가 자각해 생명 존중과 위생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선구적인 생활 개선안이었다. 그리고 해월은 도를 통하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생활 중심의 수도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해월이 <내수도문>에서 가장 강조한 수행 방법은 심고(心告)였다. 내수도문에서 해월은 “잘 때에 잡니다 고하고, 일어날 때에 일어납니다 고하고, 물 이러 갈 때에 물 이러 갑니다 고하고, 방아 찧으러 갈 때에 방아 찧으러 갑니다 고하고...”라고 아주 자세하게 심고를 하는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해월은 평소 심고를 “식고(食告)와 출필고(出必告, 외출할 때 하는 심고) 반필고(反必告, 귀가해서 하는 심고)”라고 하면서 동학 수행의 기본으로 심고만 잘 해도 도를 통한다고 했다. 이처럼 해월은 실천하는 동학, 민초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동학을 만들어 나갔다.
해월은 끊임없는 조정의 탄압 속에서 쫓겨 다니면서도 앞으로의 세상은 여성이 중심이 되는 “구녀일남(九女一男, 도를 깨달은 자 대부분이 여성)의 운수”를 말하며 수도(修道)의 근본이 여성에게 있음을 깨닫고 <내칙>과 <내수도문>을 찬술했다. 해월은 이 두 편의 법설을 통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생활이 내 몸에 모신 한울을 길러내는 양천주(養天主)하는 과정, 즉 일상생활의 성화(聖化)가 여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해월은 세상의 개혁이 혁명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개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그 주인공이 여성이라고 했다.
조선 말기 여성들은 성리학적 가치 속에서 남존여비와 칠거지악, 그리고 열녀 만들기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력 착취 속에서 마치 노예와도 같은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해월의 <내칙>과 <내수도문>은 당시 여성들에게 여성 또한 한울님을 모신 한울과 같은 존재이며, 일상생활의 수도와 포태를 통해 한울을 길러내는 위대한 존재임을 깨달아 스스로를 존중하도록 하고자 극존칭의 경어를 써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순 한글의 구어체로 찬술해 여성들이 쉽게 읽고 깨우치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이 글을 남편에게 틈나는 대로 읽어주게 해 집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공경을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졸업식 노래’를 작곡한 정순철은 해월의 외손자
정순철(鄭淳哲, 1901∼?). 해월의 딸 최윤의 아들이다. 방정환, 김기전과 더불어 어린이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정순철은 동요작가로 ‘졸업식 노래’, ‘짝짜꿍’, ‘형제별’, ‘자장가’ 등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를 많이 작곡했다. 해방 후 1948년 서울의 성신여고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는데 재직 당시 그는 ‘한국의 베토벤’이라고 불렸다. 성신여고 재직 시 6.25가 발생했고 학교 교장이 피난 가며 정순철에게 부탁하자 학교에 혼자 남아 있던 정순철은 인민군이 후퇴하던 9월 28일 납북된 것으로 전해진다.
<내수도문>에서 이야기해야 할 한 가지가 어린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해월은 <내수도문>에서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게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 천리를 모르고 일행 아이를 치면 그 아이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안에 큰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 힘쓰옵소서.”라고 어린이 존중을 강조했다. 앞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어린아이 때리지 마라’라는 해월의 이 가르침이 1920년대 김기전(金起廛)과 방정환(方定煥)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출발점이었다.
방정환, 김기전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어린이운동을 주도했던 동요작가 정순철(鄭淳哲)은 바로 해월의 외손자였다. 정순철의 어머니는 해월의 둘째부인 김씨의 딸인 최윤이다. 옥천 문바위골에 살던 해월의 가족은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1894년 옥천의 민보단에 붙잡혀 관아에 수감됐다. 이때 옥천 현감이 옥천관아의 이속(吏屬)이었던 정주현에게 최윤을 데려가 살라고 했다. 정순철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윤은 말년에 수운의 득도지인 경주로 가서 용담을 지켜 용담할매라 불렸다.
정순철은 우리나라 4대 동요작가로 손꼽힌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누구나 불렀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로 잘 알려진 ‘졸업식 노래’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 무릎에서 불렀던 ‘짝짜꿍’도 정순철의 곡이다. 이외에도 많은 동요를 작곡했는데 ‘설날’, ‘형제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호남 지역에 동학 확산
1890년 11월 금산 복호동 김창준의 집에서 올라온 해월은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금성동의 집에 잠시 들렀다가 공주 신평리 윤상오의 집에서 해를 넘겼다. 윤상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자신의 일가가 사는 공주 동막(정안면 평정리)의 집 한 채에 해월이 기거할 곳을 마련했다. 1891년 2월에 해월의 가족은 공주 동막으로 이사했다. 동막골은 이전에 살던 활원(정안면 운궁리)에서 약 5㎞ 정도 거리에 있는 깊은 산골로 해발 614m의 무정산 자락에 위치한 아늑한 곳이다. 해월의 가족은 깊은 산중이었던 동막에 은거했지만 교세의 확장으로 해월은 동막보다는 사곡면 신영리 신평에 있는 윤상오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도인들을 만나 교중 사무를 보았다.
1890년 들어와 호남 지역의 동학 확산은 심상치 않았다. 1891년 봄이 되자 남계천(南啓天), 김영조(金永祚, 일명 錫允), 김낙철(金洛喆), 김낙삼(金洛三), 金洛葑(김낙봉), 孫華仲(손화중) 등 호남의 접주들이 공주 신평리까지 해월을 찾아 왔다. 이후 호남의 접주들은 수시로 해월을 찾아 동학 교의에 대해 물어보고 확산되는 동학 조직의 운영에 대해 질의했다. 그리고 윤상오로 하여금 부안에 집을 마련하게 해 부안 지역의 동학 조직을 관리하게 했다.
당시 동학의 조직은 사람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이루어져 한 마을에도 몇 개의 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호남 지역에 접 조직이 늘어나자 접과 접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해월은 이를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해 편의장제(便義長制)를 실시했다. 편의장 조직은 이때 전라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동학혁명 이후 관의 탄압에서 벗어나 다시 교세가 확장하자 경상, 충청, 전라, 경기, 황해 등에 각 도별 편의장을 두었고 중앙에는 이를 총괄하기 위해 오도편의장(五道便義長)을 두었다.
공주시 정안면 평정리 동막골. 1891년 2월 해월은 윤상오의 일가가 기거하는 이곳으로 가족을 이주시켰다. 동막골은 무정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다.
해월은 전라우도 편의장에는 공주에서 부안으로 내려간 윤상오를 임명했고, 전라좌도 편의장에는 익산 오산에 사는 남계천을 임명했다. 그런데 남계천을 편의장으로 임명하자 호남 도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남계천이 천민 출신이라며 편의장을 맡을 자격이 없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사람이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평등한 존재인데 천민이라고 해서 편의장을 맡지 못하는 것은 교리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남계천을 옹호했다. 이렇게 갈등이 심해지자 해월은 남계천을 좌우도 편의장으로 임명해 전라도 전체를 관장하게 했다.
출처 : 울산저널i(http://www.u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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