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것과
마음 그 자체를 부수어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다.
가라앉힌 마음은 (언젠가 때가되면) 다시 일어나지만
죽어버린 마음은 더 이상 되살아나지 못한다.
호흡을 통제하고 생각을 다스려 마음을 내면의 한 길로 향하게 하면
마음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죽어버린다.
마음이 활동을 멈춘 위대한 구도자는 자신의 참된 성품을 회복했기에
꼭 해야만 할 그 어떤 일도 없다.
마음이 외부의 대상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자신의 빛나는 형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참된 지혜이다.
마음이 그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규명해 들어가면
마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마음의 실체를 규명해 나아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직접적인 길이다.
마음이란 단지 생각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의 모든 생각들 중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그 뿌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나'라는 관념인 것이다.
이 '나[小我, 個我]'라는 한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를
내면으로 방향을 돌려 찾아 보라.
그러면 이 부끄러운 '나'라는 놈은 사라지고
(진정한 나를 찾는) 지혜의 구도행(求道行)이 시작된다.
이렇게 '나'라는 관념이 사라진 그 곳에
이제 하나의 '참 나'가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존재인 '진정한 나'이다.
이것이 '나'라고 할 때 그 '나'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 이유는 비록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하던)
'나'라는 관념이 전혀 없는 상태로 깊은 잠 속에 빠져있더라도
우리는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와 감각들 그리고 마음과 숨결과 잠
이런 모든 것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진정한 실재가 아니기에 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참 나(眞我)'만이 실재인 것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That which is]'을 알아
인식하는 2차적인 그 어떤 다른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스스로를 깨닫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깨달음 그 자체인 것이다.
존재라는 근본 속성만으로 보면 성스러운 창조자와 피조물의 바탕은 하나이다.
그들의 차이는 단지 부차적인 것과 알고 있는 것의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피조물이 아무런 속성(attributes)없이 자신을 보고 자신을 알 때
그것이 곧 창조자인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는 언제나
순수한 '참 자아(Self)'로서 그 빛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를 안다는 것은 곧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이다.왜냐하면 그 둘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혜의 경지 속에서 사람은 존재와의 합일된 상태로 신의 품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여여(如如)한 상태가 앎과 무지를 뛰어넘은 참다운 깨달음으로,
이 순수한 깨달음 속에는 (인식의 주체도 없고) 인식되어지는 그 어떤 대상도 없다.
자신의 참다운 본성을 깨달은 사람은 지극한 축복과 온전한 자각의 상태 속에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 그 자체로서 살아간다.
속박과 해탈을 넘어서서 이런 지극한 축복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꿋꿋하게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나'라는 모든 자취가 사라진 뒤에도 '깨달음의 상태(that)' 그대로(alone) 살아가는 것은
정진(精進)을 위한 아름다운 참회(懺悔, 悔改, 苦行)라고
'진정한 나'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노래한다.
라마나 마하리쉬 -가르침의 정수(精髓)
*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https://www.youtube.com/watch?v=N86gbPRUX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