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학과 영성시대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8-10 19:44:18    조회: 2,027회    댓글: 0

다음 글은 어느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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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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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카프라, D.슈타인들-라스트, T.매터스 지음, 김재희 옮김, 범양출판부) 

 

과학과 종교는 시대와 인물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이 둘은 때로는 다정한 부부처럼 서로에게 좋은 반려자가 되어 주었으며, 때로는 칼부림 끝에 갈라선 원수처럼 서로를 파괴하려고 애써 왔다. 그리고 가끔 싸움이 지겨워지면, 서로 간에 등을 돌린 채 딴 살림을 차리곤 하였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과학과 종교 간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세계에 대한 모든 해석은 종교에 종속되기도 하였고, 과학이 종교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화목했던 금슬(琴瑟)이 깨어지기 시작한 주요 원인은 과학이 종교로부터 독립하면서 종교를 공격한 것에 있다. 과학은 종교를 미신으로 깔보기 시작했고, 과학이 발달하면 자연히 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종교는 과학을 배척하고 파문하였다. 종종 과학은 이단보다 더 무서운 종교의 적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지동설(地動說)과 진화론(進化論) 등은 경건한 종교인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과학이 미신과 공포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고, 인류의 복리와 건강을 위해 크게 기여한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종교인들도 과학의 혜택을 많이 누렸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은 늘 좋은 결과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과학이 도덕의 황폐화, 인명 살상과 자연 파괴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도 우리는 무시해선 안 된다. 과학이 때로는 종교가 미치지 못하는 신비한 영역을 해명해 주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스스로 유일한 예언자나 구원자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금세기의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Einstein)이 말한 대로, "과학을 무시하는 종교는 절름발이요, 종교를 무시하는 과학은 장님이다." 오늘 날에 이르러 성숙한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은 상대방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면서 서로 협력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하나 밖에 없는 지구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주의로 인하여 점점 더 오염되고 파괴되는 위험에 직면하자, 과학은 종교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종교도 과학의 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제 이 둘은 서로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전우(戰友)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 신학은 창조론과 인간론 등을 현대인에게 합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과학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과학은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우주와 생명의 궁극적인 신비로 인도하기 위해 종교의 체험과 깨달음을 수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흔히 자신의 우군(友軍)으로 삼은 것은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아니라 동양 종교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프리쵸프 카프라(Fritjof Capra)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오래 동안 소립자(素粒子)를 연구한 물리학 교수였지만, 물리학을 동양 사상과 비교하는 강연과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던 자이다. 특히 그가 저술한 "The Tao of Physics"(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 1979, 범양사출판부)과 "The Turning Point"(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1095, 범양사출판부)이라는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구미(歐美)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과학 운동, 새로운 생활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앞의 책은 현대 물리학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관을 상세히 서술하고, 이런 세계관이 동양의 종교(힌두교, 불교, 도교 등)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즉 물질 세계가 극미(極微)로부터 극대(極大)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이며, 세계의 각 부분들이 역동적인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낸 현대 물리학의 통일적, 유기체적 자연관은 동양적 지혜와 본질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뒤의 책은 앞의 책에서 주장한 이론을 근거로 삼아서 현대 문명의 위기를 진단하고, 사조(思潮)와 문명의 전환을 바라본다. 즉 기계론적-분석적-사변적-물질적-개인적-남성적 특징을 갖는 문화는 이제 쇠망해 가고, 그 대신에 종합적-직관적-정신적-여성적 특징을 갖는 문화가 도래하리라는 것이다. 모든 우주적 현상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시스템(System)적 이해는 근본적으로 영적이며, 신비주의적 전통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최초로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나의 창조 신앙을 위협해 온 무신론적 "진화론"을 어떻게든 공박하여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학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나는 틈틈이 진화론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창조론이 얼마나 성서적인가를 주장하는 책들을 주로 읽었다. 그러나 70년대가 되자, 과학에 대한 관심은 역사에 대한 관심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싹튼 나의 고민은 더 이상 "신앙과 과학"이 아니라 "신앙과 역사"였다. 그러다가 독일 유학 중에 나는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재앙을 생생히 경험하였다. 유럽 전체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환경 문제가 터져 나왔다(낙동강 페놀 유출, 공해, 이상 기온 등).

 

환경과 생명, 자연은 이제 신학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다시금 과학 서적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때에 내가 주목하게 된 책이 바로 앞의 두 책이었다. 흥미와 감동 속에 이 책을 읽었지만, 마음 속에는 왠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즉 과학과 종교의 대화 마당에서 기독교가 설 자리는 전혀 없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졌다. 물론 기독교는 과학으로부터 유래하지도 않았고, 과학의 양분을 취해 자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과학이 종교보다 점점 더 설득력을 얻어 가는 시대에, 그리고 과학의 영향이 날로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상황에 기독교는 마냥 과학과 담을 쌓고 지낼 수 있겠는가? 과학을 무시하는 기독교는 현대인에게 절름발이 종교로 비치지 않겠는가? 아니 현대 과학은 이제 기독교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는가? 앞으로 새로운 문명과 영성(靈性)은 동양 종교로부터 나올 것인가?

 

물론 샤르댕(Chardin)의 진화론적 기독교 이해와 화이트헤드(Whitehead)의 이론을 차용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제 나름대로 과학과 신앙을 종합하려는 진지한 노력의 산물이었고, 그래서 과학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여전히 동양 종교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기독교가 현대 과학을 통하여 현대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는가? 기독교는 오늘 날에도 다시금 옛날처럼 현대 과학과 정면으로 충돌함으로써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나의 고민은 별다른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중에 나는 다시금 카프라의 새 책, "Belonging to the Universe"(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1997, 범양사출판부)을 접하게 되었다. 아니 이 책은 이제 카프라가 두 명의 카톨릭 신부와 대화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아니 실로 이 책은 현대 과학과 신학이 대화하고 있는 책이다. 원서의 제목은 "우주에 속함"이지만, 역자는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한 듯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라고 옮기고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새로운 과학이 기독교적 영성과 어떻게 합일되는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과학과 신학의 패러다임(Paradigm: 사고 모형)의 전환(轉換)은 5가지의 공통된 특징을 지닌다. 

 

1. 부분에서 전체로 

 

학문 전반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첫 번째 특성은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이다. 한 부분을 묘사하면서 이를 다른 부분으로부터 떼어 내는 순간, 거기서 벌써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심층생태론은 인간을 자연에서 떼어 낼 수 없는 하나의 부분으로, 얼크러진 생명의 그물을 함께 잣는 독특한 실의 가닥으로 간주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존재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현실적 조건에 함께 묶여 있다(로마서 8장의 피조물의 신음). 자연에서 인간의 참된 자리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예언대로 아이들처럼 순진무구하게 자연과 완벽하게 어우러진 바로 그곳이다. 인간의 참다운 본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고양된다. 마음은 하나의 과정이고, 모든 생명체에는 그에 해당하는 마음의 작용이 있다. 우주는 스스로 짜짓는 생명의 존재이다. 인간은 대우주의 축소판이다. 

 

2. 구조에서 과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구조'라는 것은 온갖 현상이 빚어내는 밑바탕인 '과정'이 능동적으로 활동을 펼치며 드러내는 규칙일 뿐이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환경에 적응하고 무언가를 터득하면서 새롭게 진화해 간다. 이 모든 단계마다 창조성이 발휘된다. 생명체와 환경(환경도 생명이다)은 서로 정신적 반응을 하면서 함께 진화한다. 그러므로 진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목적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떼이야르는 시간과 목적이 인간을 넘어서는 한 점에서 합쳐지는데, 거기서 바로 영원한 완성이신 우주의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하였다. 

 

3.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적 학문으로 

 

우리가 무엇을 볼 때, 그 결과는 어떤 관찰 방법을 쓰느냐에 다라서 달라진다. 무엇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주관성은 세상 만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에 깊숙이 개입된다. 지식은 현실과의 끊임없는 대화의 일종이다. 인간의 의식(意識)도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현상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은 나무를 보면서 몇 가지 구조를 따질 것이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은 나무를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현상(광합성)으로 본다.

 

4. 건물에서 그물로 

 

이제 지식의 체계는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진 건물 구조라기보다는 서로가 얽히고 설켜 있는 그물 구조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도 세상 저 위에 버티고 앉아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서로 만나고 통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 세상은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살아 있는 시스템이다. 

 

5. 절대치에서 근사치로 

 

아무리 정밀한 측정이나 평가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근사치 밖에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과학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느 부분도 딱 잘라서 명확하게 그 특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세상에 홀로 고립되거나 완전히 독립된 사물은 없다. 그렇게 느끼는 감각은 망상일 뿐이다. 진정한 신비는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 

 

만물의 상호 연관성, 지속가능한 발전,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책은 영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은 이제 구원을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은 혼자 떨어져 나온 소외의 상태에서 공동체,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종교적 영성은 그 자체로서 사회적일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구원 중심의 신학은 창조 중심의 신학과 연결되어 있다. 즉 생태론에 따르는 생활 양식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영성이다.

 

367쪽에 달하는 부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평이한 대화체로 쓰여져 있어서, 독자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만물은 사랑의 힘으로 이끌린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말로 귀착되는 것 같다. 오늘 날의 진정한 영성은 만물이 유기적으로 함께 얽혀 있다는 깨달음 아래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에 있음을 이 책은 역설한다. 이런 영성은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영성이며, 하나님의 신비(하나님도 삼위일체로서 공동체적이시다)와 조화를 이루는 영성이다. 우주 만물이 다같이 궁극적인 실체이신 하나님에게 속해 있으며, 만물이 다함께 서로 속해 있다는 귀속감을 지니는 영성이야말로 문명의 전환 속에 있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영성이다.

 

이 책은 현대 과학이 동양 종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영성과도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증거이다. 사실 기독교도 동양 종교가 아닌가? 그러나 기독교가 서양으로 전파되고 서양의 사고 방식과 밀접히 결합됨으로써, 기독교의 영성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변질되어 온 것 같다. 즉 하나님과 우주,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영과 육, 개인과 사회가 분열되고, 그러한 틈새로 권력과 착취, 억압의 세력이 침투함으로써,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인류의 문명이 위기를 초래한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완성과 화해로 이끄시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환경 파괴, 아니 지구 생명체 파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앙 앞에서 시급히 요구되는 영성은 바로 이러한 우주적 영성, 창조적 영성이다.

 

이전의 책에서 동양 종교의 "순환 이론"을 강조했던 카프라가 이 책에서는 기독교의 "목적론"을 수용하고 있음이 흥미롭다. 사실 현대 물리학은 만물의 순환만이 아니라 그 진화(우주와 생명의 진화)도 보여준다. 우주는 순환 속에서 진화하고, 진화하면서도 순환한다. 즉 세계의 각 부분들은 불가피하게 하나를 이루면서 미래로 전진하다. 하지만 이 진보는 더 큰 조화를 낳는다. 인류는 더 큰 조화 속에서 진보할 것이고, 더 큰 진보 속에서 조화를 이룰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 종교는 조화 속에서 진보(만물의 구원)를 배워야 할 것이고, 기독교는 진보 속에서 조화(사귐을 위한 구원)를 배워야 하리라. 우리는 모두 지금 거대한 정신 혁명, 아니 문명 혁명을 보고 있다.

 

* 출처: 성결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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