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어떠한 새로운 도구나 기술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종종 열광하며, 때로 맹신 혹은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에 관해서 마찬가지 태도를 보인다. 상용화 초창기와 별다를 바 없이 인터넷은 여전히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숭배되기도 한다.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웹 저작도구인 블로그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블로그를 사용하던 초창기에 트랙백(서로 다른 곳에서 작성한 비슷한 주제의 두 글을 링크하는 기능, 대부분의 블로그에서 채택하고 있다.) 기능에서 새로운 방식의 토론 문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블로그에서 트랙백 기능을 빼버렸다. 기대한 것에 미흡했기 때문이다.
아마 멀지 않은 장래에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링크 기능이 혁명적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트랙백 기능에 대한 예상과 기대는 빗나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이 기능을 이용해 다른 블로그 사용자와 주고받았던 이야기들 모두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는 새로운 방식의 온라인 토론, 새로운 형태의 링크에 대한 기대가 이미 싹트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전개 과정이 개별적인 발견과 발명의 축적에 의해서 발달되거나 차근차근 그 오류를 수정해온 역사가 아니라, 이전의 판을 완전히 엎는 혁명의 전개사임을 밝혔다. 여러 이론이 공존하는 전(pre) 과학 단계에서 한 이론이 우월적(prior) 지위를 차지하는 정상 과학의 단계로 전개된다. 그런데 정상(normal)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anomaly) 징후와 현상들이 등장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이론의 혁명적 등장을 예고한다.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에서 새로운 정상 과학이 정립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설정해 준다는 점이다. 패러다임은 사회의 규준을 제시한다. 일단 패러다임이 정해지면 수많은 장치가 그것의 정밀한 증명을 위해 동원된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정상과학을 보고 배운다. 그러나 기존 정상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고 이 중 하나가 정상 과학이 되는 과정이 역사 속에서 되풀이된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은 패러다임 변화의 상징이다. 기존 과학을 정면으로 위반한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과학자들은 친숙한 상황에서 낯선 게슈탈트(형태)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정상 과학은 이상 징후들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유지하기 위한 정상 과학 진영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패러다임을 지탱하는 정상 과학은 반동적 성향을 띠며 과학은 점점 경직돼 간다. 반동은 혁명을 잉태한다. 혁명의 성취 안에 이미 모순을 품는 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변증법적 이행의 과정이다. 변증법의 과정을 통해 기존의 학설 중 틀린 것은 폐기되고 옳은 것은 채택된다.
서로 모순돼 보이는 두 가지 이론이 대립했을 때 혁명처럼 그 상위의 규준이 등장하는 것을 변증법적 지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쿤이 말하고자 했던 패러다임 변화의 원리일 것이다. 이전의 모든 연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연구의 불씨로 활용하는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는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명제들은 동시에 참일 수는 없어도 동시에 거짓일 수는 있다. 이러한 끝없는 부정을 통해 참의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논리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최초에 포착했던 이상 징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과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소의 발견 자체는 화학 이론에서의 변화의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그 이전의 대기 연구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음을 인지했다.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우연한 발견처럼 알려진 과학적 성과들은 대개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했을 때 사용했던 장치는 당시 다른 과학자들도 많이 쓰고 있던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학 활동에 있어서 성공이라고 불리는 것의 상당 부분은, 필요하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사회가 그것을 기꺼이 옹호하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러한 노력이 가져올 결과가 어떠할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이상 징후가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학적 성취에 대한 맹신 혹은 숭배다. 이것은 다른 학문 영역이나 일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비쿼터스 인터넷 시대를 살아갈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로버트 칼리우 박사는 몇 달 전 사이언스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넷은 대단한 혁명을 일으켰다. 비단 정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양식과 사고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인의 거의 모든 삶의 방식에 영향을 끼쳤던 인터넷에서 우리는 어떠한 이상 징후를 발견하는가. 인터넷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인터넷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인터넷을 활용해야 한다. 타인의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박하고 명료한 태도가 그 단초가 될 것이다. 이러한 태도들이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될 과학의 변증법적 발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 ScienceTimes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