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학과 영성시대지금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 방건웅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06 16:18:09    조회: 1,573회    댓글: 0

지금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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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건웅 : 공학박사, 한국표준과학연구소

 

- 신과학기술의 특징과 태동 -

서양에서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신과학기술은 신세계를 맞이한다는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서양에서 동양의 요가철학이나 도가철학, 그리고 선(禪)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서양의 물질문명의 발달과 그로 인해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가지 폐해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비롯된 바 크다.

 

서양에서의 과학기술이 꽃피기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환원주의적 철학에 바탕을 두고 물체의 운동과정을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요소는 전적으로 배제되었고, 또한 불확실한 요소들도 배제되었다. 이 결과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요인 들은 인정되지 않았고 연구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1. 과학기술 혁명 - 패러다임의 전환 

  

1)유연한 사고 - 왜 필요한가?

 

사람의 일생은 장구한 역사에 비한다면 짧기 때문에 인류 발전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 과정을 다시 곱씹어 보지 않는다면 과학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잘못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의 눈부신 과학기술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한발 한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중세 이전의 오랜잠복기를 거쳐서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그 싹이 움터서 자란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어떤 단계를 이루면서 파동을 타고 한걸음 껑충 뛰어 넘는 형태로 발전되어온 것이다.

 

과학기술의 용어를 빌린다면 연속적인 발전이 아니라 양자적(量子的)인 발전을 이루어 온 것이다. 한단계 뛰어 오른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다가 이것이 한계에 부딪치면 새로운돌파구가 마련되면서 또 한단계 뛰어 오르는 것이다.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토마스 쿤으로서 그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고체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사고방식의 전개, 혹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이론이 제안 되었을 때마다 인류가 그것을 선뜻받아들인 것만은 아니다. 항상 기존의 학문체계나 사고방식, 혹은 기존이론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반발이 뒤따랐다.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설명에 대한 진지한 청취, 혹은 자연에 대한 끝없는 탐구정신으로 새로운 설명을 경청하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새로운 이론이나 발명, 혹은 발견에 귀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

 

가장 최근의 예를 든다면 영국의 러브록이 제안한 '가이아 이론'이 있다. 지구를 하나의 자율적인 제어체계를 갖춘 유기적조직체로 본다는 이 이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기존의 학계에서 반발이 심하였고, 그는 자신의 논문을 기존의 학회지에 발표하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무엇 때문에 새로운 제안이나 이론이 제시될 때 기존의 학계는 이를 무시하거나 비판할까? 이는 단순히 열린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즉 새로운 사실을 탐구하는 모험정신이 적거나, 혹은 자신이 이미받아들이고 있는 학문체계 안에 그냥 편안하게 안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것이다.

 

어떤 이론이 맞다고 믿고 그 바탕 위에서 평생을 연구하여 왔는데 어느날 그것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해보라.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덩이가 흔들리고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텐데 새로운 설명을 받아들이기가 쉽겠는가?예를 든다면, 지구가 평평하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으며 땅덩이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라 태양이 가만히 있는 것이고 지구가 그 주위를 초속 30만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하루에 한바퀴 도는데 그 회전 속도가 눈이 빙글빙글 돌아 버릴 정도인 초속 256km이고, 땅덩이는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다고 한다면 이것이 받아들여지기가 쉽겠는가 말이다.

 

아니 어떻게 땅덩이가 하늘 가운데 떠 있고 밑으로 떨어지지 아니하며 표면에 있는 물과 사람들이 어떻게 붙어 있을까? 이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최근의 예를 든다면 자연은 사람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있던 과학자들에게, 소립자를 연구하여 보니까 측정하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측정결과가 영향을 받는다는 실험 결과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사람의 마음이 물질의 운동에 영향을 미칠까? 더 나아가 입자라는 것이 자세히 들여다 보니까 덩어리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면서 조건에 따라 두가지 특성을 다 나타내는 마술적인 존재와도 같은 것이라는 결과는 더더구나 과학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던 것이다.이처럼 기존의 상식을 깨거나 이론의 밑바탕을 흔드는 새로운 실험결과나 이론들은 기존의 학계에 발을 디디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의 변신, 즉 새로운 설명을 받아들이거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기존 학계의 이론을 고수하는 과학자들이 끝까지 몰리고 난 다음에야 가능했던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은 이제 안되겠다고 할 때에야 사람들은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자기자신인 것처럼 자신과 동일시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매여 있기 십상이며, 자신의 존재기반을 뒤흔드는 설명을 좀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새로운가설이나 이론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은 이들을 설득시키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물론 이러한 기존학계의 검증과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사리오류에 빠지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갈 수 있다는 좋은 점이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향을 볼때 기존 학계의 반발은 검증하고 확인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내용들이 모두 다 혁명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미리 사고의 유연성을 키워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특히나 과학기술자들이 일반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보수적이며 모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이 근을 책의 서두에 써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사고의 유연성을 키우기 위하여 우선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자.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답을 선뜻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야말로 도를 닦아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나는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필자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으로 이에 대한 답의 언저리는 만져볼 수 있다. 우리 자신이 한국이 아니라 중동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거의 99% 유일신 알라를 신봉하고 있을 것이며, 하루 5번씩 성지를 향하여 절을 하는 생활이 일상화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생활 지침이 코란에 실려 있는 경귀들 그대로일것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태어난 나와 중동에서 태어난 나를 놓고 생각해보자.

 

과연 어느 것이 정말 나인가? 둘다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이 질문을 자신에게 한번 던져보라. 자기가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근거가 얼마나취약한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것을 생각하기조차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서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바로 참된 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지금의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경험하고, 듣고, 보고,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고방식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나는 아닌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태어난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180도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절대적인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도 얼마든지 그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이 자라온 생활환경과 같은 과정을 거쳐 왔다면 얼마든지 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비유하여 말한다면, 태어나 자라면서 우리의 두뇌에 입력된 정보에 따라 생각의 틀이 형성되는 것이며, 새로운 정보나 경험을 쌓게 되면 기존의 생각의 틀이 바뀌거나 깨지면서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어렸을 때는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지자 자라면서 점점 생각의 틀에 갇혀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이 틀에 갇혀 지내기로 작정한 이상에는 새로운 경험을 할 여유, 혹은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참된 나 그것은 생각의 자리가 멸한 곳에서, 즉자신의 근본 성품, 마음의 자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불교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이 종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우리자신의 생각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정도로 생각의 폭을 넓히면 우리의 사고는 어느정도 유연성을 회복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새로운이론등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만이 절대적인 잣대인양 마구 휘두르거나, 자신의 생각의 틀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이를 부정하기만하는 어리석음은 최소한 피할수 있게 된다.일반적으로 사고가 경직되어 있거나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학문체계를 굳게 신봉하는 학자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반응들중의 하나는, 자신의 학문체계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연구결과나 자연 현상이 보고되면 이를 부정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이다.

 

이것도 자신의 판단기준이라는 잣대를 마구 휘두르는 횡포중의 하나인데, 이러한 경향은 자신이 판단하고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맞지 않는다.

 

즉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현상이 나타났다면, 나타난 그 현실은 일단 부정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이 현상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거나 무시하려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이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아니면 기존의 학문체계를 동원하여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든지하는 것이 학자로서 취할 태도인 것이다. 즉 부정하려면 그것은 "내가 실험을 해보니까 이런 것이더라"하고 반증을 대면서 이야기 해야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실험을 할 능력도 없고 하지도 않을 생각이라면, 내가 아는 학문의 체계로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한다는 자세가 타당한 것이지 않겠는가?필자의 경험으로는 새로운 자연현상, 특히 기조의 이론과는 맞지않는 현상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 보다도 오히려 과학기술자들이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더 많았다. 이러한 막힌 반응, 혹은 좋게 말해서 보수적인 반응이 과학기술자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신중하게 대응한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일반 사람들은 잃을 것이 없는데 비하여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과 함께 자신이 속한 학계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기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우리의 전통과학 기술이 완전히 단절되는 바람에 1960년대이후에야 다시 형성되기 시작한 과학기술자 집단이 거의 전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서구의 환원주의 과학절학에 바탕을 두고 발전된 현대 서구 과학기술이 절대적인 것인 양 받들어모셔지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전통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서구의자연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연구결과나 자연현상을 무시하는 경향이 매우크다.

 

학문의 발전에는 두가지 방향이 있다. 그 하나는 기존의 지식을 더욱 깊이 파는 것으로서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활동의 거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학문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연구로서 그야말로 새로운학문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정된 과학기술 인력과 재원 때문에 지금까지 기존의 학문세계의 틀 안에서 서구를 뒤쫓아가기 바빴으나 실제로 학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개척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구를 앞질러 이끌고 가려면 새로운 학문세계의 개척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한국인 특유의 모험정신과 창조성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서구에서는 풍부한 과학기술인력과 재원으로 새로운 학문세계를 개척하기 위한 연구활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 책에 실린 내용은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구에서 이미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기술들인 것이다.우리나라의 과학기술계는 이미 어느정도 확립된 기술들을 중심으로 연구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시장성이 눈에 확실히 보이는 기술들을 중심으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현황이다.

 

다시 말한다면 연구개발에 있어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안전운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창조적인 연구개발이야말로 위험하더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모험 운행이 필요한 분야인데 지나치게 안전운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전운행을 하는 논리의 밑바닥에는 경제논리가 깔려 있다. 투자한 연구비에 대해 언제까지 얼마나 회수가 가능한가 하는 논리에 따라 연구과제가 선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에는 그림 원화를 그리는 것과 인쇄물의 제작이라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관료들의 사고 방식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유는 과학기술 담당관료들이 자신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 눈에 보이는 실적을 올려야 하겠다는 생각에서도 비롯되었다고본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과학기술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서 기술도입해서 해결한다는 발상의 수준에서 연구개발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개발을 진행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위험부담의 기간이 매우 짧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언제까지 그림을 몇점 그리시오' 하고 주문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림 그리는 일은 창조성의 발휘가 중요하며 시간표를 설정하고 그린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쇄의 경우는 다르다. 시간표에 따른 인쇄기술의 향상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며 일단 기술의 개발이 완료되면 곧바로 대량제작에 착수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과학기술 연구개발비 지원 경향을 보면 그림의 원화를 그리는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지원된 예가 드물고 대부분이 인쇄술의 향상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자들 가운데서도 그림을 그리는 연구활동에 시간을 내어 그리나 이제는 우리도 서구의 뒤꽁무니만 쫓아 가는데서 벗어나 일부만이라도 현재 서구에서 싹이 트고 있는 기술분야, 그만큼 연구개발에 있어서의 위험부담이 큰 분야에 대해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과학기술자로서 연구에 실패할경우 다시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을 투입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연구비를 지원할만하지 않겠는가?앞에서 유연한 사고의 전개가 새로운 과학기술개념의 등장에 필요하다고 하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과학기술 분야의 혁명은 지금까지의 단순한 과학기술의 진보와는 그 궤를 달리 하는 것으로서 과학기술분야에만 그 영향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윤리관의 변화까지도 수반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그 어느때 보다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절감될 때이다.

 

지금까지의 과학기술 사고체계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과학기술혁명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은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기 때문에 이사회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사고체계에 익숙하다. 환원주의적 사고체계는 쉽게 말하자면 미분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환원(還元, reduction)이라 함은 어떤 물체에 대해서 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로 환원시켜서 하나하나 나누어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들어보자. 자동차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환원주의적으로 접근한다면 자동차를 하나하나 부품으로 환원시켜서 설명을 하고 연구를 한다. 즉 동력발생장치, 동력전달장치, 조향장치, 제어계통등으로 나누어 접근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의 자동차를 하나하나 부품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니 곧 미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인류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그러나, 이환원주의적 접근방법은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부품들이 종합적으로 어떤 기능을 발휘할 경우에는 그렇게 효율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자동차와 같은 기계장치의 경우에는 자동차를 구성하는 부품의 기능을 환원주의적 접근을 통해 이해한 다음에 이 부품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여 자동차가 굴러가는지 이해할 수 있지만 생물체의 경우와 같이 각각의 장기들이 모여서 단순히 장기들이 모여져있는 이상의 기능을 발휘하게 될 때는 환원주의적 접근방법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게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장기의 기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지식만으로는 이들로 구성된 인체의 전체적 기능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나 마음이라는 변수가 고려될 때는 더욱그러하다.환원주의적 접근에 의한 이해가 쉽지 않은 다른 이유는 종합적인 해석이 어렵다는 것과 구성 부품별로 나누어 나가는 과정에서 장기와 장기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 그로 인한 요인이 무시되기 쉽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생물체의 경우와 같은 때는 환원주의적 접근만으로 그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특히나 마음과 몸의 관계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마음과 몸의 관계를 무시한 채 접근하는 치료법과 같은 경우에는 효과를 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있는 것이다. 특히나 병원체에 의한 질병은 환원주의적 접근에 의한 치료가 비교적 용이한 편이나 그러하지 않고 만성병의 경우에는 치료효과를 보기가 어렵다. 이러한 경우에는 미분의 기술이 아니라 적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각 장기들의 조합에 의해 장기 하나만을 놓고 보았을 때와는 다른 상호 작용에 의한 새로운기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이러한 기술의 필요성에 대해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고체계의 전환이 왜 지금 필요하게 되었고 이제 이러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가? 그것은 현재의 과학기술이 한계점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전환이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한계에 도달할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서양에서 발전되어온 미분기술은 이제 미분 기술의 대전제가 그릇되었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에 비유한다면 마음과 몸의 상관관계가 철저히 부정된 상태에서 근대 의학이 발전되어 왔으나 이것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실제로 만성병의 경우에는 근대의학이 힘을 못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금세기초의 환자들에 대한 통계를 보면 폐렴, 독감, 콜레라 등의 급성질병환자들이 90%이 상이 될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습성질병으로 인한 환자들의 숫자가 금세기 말에는 거의 줄어든 반면에 당뇨병, 고혈압, 암등과 같은 병원성세균에 의한 병이 아닌만성병 환자들이 증가하여 그 비율이 역전된 상태이며 전체적인 환자들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들 만성병환자들에 대한 시원한 치유방안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해결책이 서양의 미분기술로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마음과 몸의 상관관계를 인정하는 전제아래에서 사람의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로 인한 몸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없이는 만성병에 대한 해결책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발상의 전환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발상의 전환으로는 아무리해도 미봉책정도의 해결책만이 나올 뿐이다. 문제의 발단이 미분기술의 대전제, 즉 부품으로 하나하나 뜯어 보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전제에서 비롯 된 것이니만큼 이를 바꾸는 발상의 전환, 곧 적분기술에 입각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하는 느낌을 받는다. 발상을 전환한다고 하는데 어디로 어떻게 전환하라는 것인가? 그저 전혀 엉뚱한 착상의 변환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세대와 같은 사고를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필자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특히나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이나 자연관계등에서는 적분기술에 입각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절감하고 있다.

 

- 미내사클럽 '지금여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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