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철학의 비교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개인이나 국가나 문화로부터 받는 인상을 토대로 하여 그것의 특징은 이러이러하다고 단정을 내리게 된다. 이 인상이 단편적일 때 우리의 단정은 속단이 될 수 있고 속단은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속단은 여러가지 폐해를 유발할 수 있으며 특히 큰 지장을 주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일반화를 시도하고 이것으로 우리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그 개념을 통하여 대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속단이 아닌 정확하고 타당한 일반화는 단편적인 인상을 넘어서 그 본질을 파악할 때 가능하다. 타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일반화된 개념을 가지고 그 문화의 특징을 지적하는 일은 흔히 우리가 하는 일이며 또한 불가피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편적인 인상으로 일반화할 수도 있고 본질적 파악에서 오는 개념으로 일반화할 수도 있다. 물론 동서문화의 본질적 파악에서 오는 개념을 가지고 동서문화의 특징을 묘사할 때에 이런 묘사는 동서문화의 차이점과 공통점을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흔히 동양과 서양에서 동서문화의 특색을 말할 때 서양의 물질주의와 동양의 신비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일반화는 깊은 생각과 성찰이 없이 동서문화의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동양에도 물질주의가 전혀없는 것이 아니고 서양에도 신비주의가 결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러한 것은 아마도 현대 서양의 과학과 기술로 말미암아 세워진 물질문명을 근거로 관찰할 때 서양은 물질주의라고 동양은 이런 물질문명이 발달되지 않아 정신주의 또는 신비주의라는 말로 묘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철학적 또는 사상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비교는 타당성을 잃는다.
비교철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은 지성이요 동양은 직관이라는 특징을 지적할 수가 있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지성적이요 이성적이요 논리적인데 반하여 동양은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직관은 보는 것이요 전체를 관망하는 것이고 지성은 보는 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보지 않고 생각할 수는 없다. 먼저 보고 경험하고서 이 본 것을 분석하고 궁리하고 추리하고 가정하는 것이다. 동양의 직관도 보기만 하고 끝나는 것은 아니고 이를 생각하고 궁리하지만 역시 직관적 관망을 강조하는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 풍우란은 중국의 철학적 방법은 농부의 견해를 가졌다고 한다. 즉 농장이나 곡식과 같이 농부가 다루는 것은 모두 이들이 직접적으로 보고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들이 직접 파악한 것을 가지고 철학을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인이 사용하는 용어도 암시적이며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보고듣고 느끼는 바를 그대로 표현하는데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정밀한 개념적 묘사가 없고 본질적으로 시적이라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 문명을 토대로 하여 성장한 서양문화는 상인의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희랍의 철학자가 살았던 곳은 도시요 또 도시는 상인들의 활동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의 이성에 관한 이해가 오늘에 와서는 객관적이요 타산적이요 조작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을 보더라도 서양철학의 기본적 견해는 상인의 견해라고 할 수가 있다.
동서사고의 차이점에 관한 개념적 구상을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규정지은 현대철학자는 예일대학의 노드롭(Northrop)이다. 그는 사고의 두가지 기본적 개념을 하나는 직관에 의한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가정에 의한 개념인데 전자는 동양인의 사고방식이고 후자는 서양인의 사고방식이라고 보았다. 직관에 의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감지된 것으로 인하여 그 뜻이 전부 주어지는 것으로 추측을 통하여 안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보고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에 의한 개념은 연역적 이론의 가정으로 말미암아 그 전적 의미가 나타나는 개념으로 여기서 연역적 이론이란 가정과 정리로 구성되며 가정은 논리적으로 정리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가정이 주어지면 정리는 증명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과 철학은 이 가정에 의한 개념으로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로써 이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하는 이론을 세워 최초로 서양철학에 가정에 의한 개념을 소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원자라는 관찰할 수 없는 실제를 가정한 후 이로부터 연역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서양의 합리적 논리적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쉘돈(Sheldon) 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대비로 동서철학을 비교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동양에서는 궁극의 실제가 이 현상세계의 데이터에 의한 논의로는 증명될 수 없으며 직접경험에 의하여 체험되어야 하며 철학이란 인생의 길이며 그것에 대한 사고가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이다. 즉 실천과 함께 시작을 하고 궁극의 실재의 체험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본래 실천적이며 비록 논의가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이론적인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철학이란 실재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며 사물과 사건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가를 추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인생의 길은 아니다. 비록 논의가 바른 길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의 입증은 이성에 의하여만 증명이 되는 것이다. 즉 실재는 밖으로부터 주시하는 대상이요 직접 경험 즉 자신의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궁극의 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쉘돈은 서양은 리얼한 것을 보기를 원하고 동양은 리얼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서양은 내가 객관적인 대상을 보는 것이요 동양은 자기자신이 바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의 사유형태는 외계의 물질을 변화시켜 소위 과학문명을 이루어 풍부한 물질적인 경제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동양의 사유형태는 인간의 내적인 잠재의식을 일깨워 자시자신을 변혁시켜 도나 無我의 경지에 이르는 정신적 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서양은 객관적 외계에 관심을 두고 동양은 주관적 내적 세계에 관심을 두고있다.
둘째로 서양은 우주론 세계사 자연철학 더 나아가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주어진 세계에 대한 서양의 관심은 분화하여 화학 물리학 생물학등에 두게 되었으며 동양은 처음부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양은 자연과학적인 사고를 통하여 현세의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동양은 자연이나 사회상태를 개량하는데는 관심이 없었고 세속적인 현세를 넘어 궁극의 종교적인 세계에 도달하는데 있었다.
세째로 서양은 현세주의 창조적 진화 돌연변이 진보 등과 같이 역사적으로 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발전적인 시간의 가치와 과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은 자연이 갖는 시간의 경과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직 선악의 차별을 초월한 심원한 내적인 세계로 들어가 근원적인 하나와 만나는 것이다.
이외에도 서양은 그 사상의 밑바탕에 이즘(ism) 즉 어떤 主義가 깔려있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 직관주의 유물주의 실증주의 실용주의 구조주의 실존주의 등이 그것으로 이렇게 주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각각의 사상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철학의 장점은 각각의 철학의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 사상을 이해하기가 쉬우며 다른 사상과의 비교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철학에 있어서는 각각의 사상간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사상간의 유기적인 전체성을 중요시하고 사상간의 한계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결코 사상간의 무질서한 혼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동양의 논리는 조화의 논리인데 반하여 서양의 논리를 투쟁의 논리라고 주장하거니와 실제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간의 극단적인 대립은 서양적인 이즘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동서사상을 비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현대사상의 반주지주의적인 사상들 즉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맹목적 의지의 부정과 니이체의 초인의 철학을 기점으로 베르그송의 생철학 칼야스퍼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에 반영된 붓다 용수 공자등의 연구를 비롯하여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현상학등 많은 반주지주의 철학사조들이 한결같이 서양의 전통적인 이성의 철학에 반대하여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반주지주의 철학들이 일부는 동양철학에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동양의 직관적 세계와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을 여러 점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비관론 주정주의 절망 상실감 소외감 무력감을 나타내는 실존주의는 개별적인 주체를 우선하며 개체는 의식을 가지고 유일하며 유한하고 타인과 타물과 교섭하며 절대로 물건처럼 연구대상이 아니며 어느 집단에 소속된 일원이나 전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공통된 딱지는 질색이다. 이런 개체는 자유롭다. 사물은 자연과학적 법칙으로 설명될는지모르지만 개인은 실험 관찰 계량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유로운 반면에 그 개인은 자기가 선택한 행동에 전적인 책임을 진다.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제약 즉 그것이 유일신이건 창조주이건 추상적 이성이건 사회집단이건간에 얽매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 요청된다. 성실한 실존적 삶이란 자율성 창의성 생동감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기독교적 절대주의나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와는 어울리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삶의 밑바탕을 꿰뚫어 보는 여러가지 직관적 혜안을 가짐으로서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목할 것은 다른 서양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론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철학들은 그 어느 것도 이론이 아니라 수행과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깨달음과 해탈의 직접적인 체험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가 있다. 우리가 진실로 실존과 無 혹은 죽음에 도전하려면 아무리 훌륭한 이론을 통하여 실재의 세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된 지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동양철학은 한갓 사상 이념 생각하는 방식에 관여할 뿐만아니라 삶의 방향을 지도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흔히 종교와 철학 내지 과학과의 극렬한 투쟁으로 점철된 서양철학사를 훑어본 사람들은 동양철학과 종교와의 밀접한 연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사실 기독교란 유일신 종교만이 유일한 종교요 따라서 철학은 언제나 그 독단적 교리를 파괴하는 신성모독 우상파괴의 짓거리를 자행하는 망나니로 보아온 기독교적 철학시대의 유물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에게 동양철학과 동양종교는 구분할 필요가 없고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