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는 단군할아버지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06 23:53:44    조회: 3,173회    댓글: 0

다시 찾는 단군할아버지

 

 

- 단군성조의 어진봉안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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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영정

 

 

1.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위의 내용은 누구나 다 불러본 적이 있는 개천절 노래의 가사이다. 개천절은 4대 국경일의 하나로서 우리 민족의 시조이신 단군왕검께서 구환족(九桓族)을 재통일 하시고, 고조선을 건국한 상달 3일(10월 3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또 우리는 전국체전시 초대 단군께서 88세 되시던 해(BC 2283년)에 운사(雲師)벼슬에 있단 배달신(倍達臣)에게 명령하여 강화도 마니산에 쌓았던 제천단(祭天檀)에서 성화를 채화하여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되 새기 민족의 정기를 계승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부터인가 '단군신화'라는 야릇한 말로써 역사를 부정하고 자기의 신원을 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일 삼고 있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서 고조선의 건국과 단군의 실존은 너무도 당연한 내용으로서 사대주의 사학자인 김부식, 김일연도 감히 부정하지 못했던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이었다. 1908년에 발행된 구한말의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도 단군의 영정과 함께 단군의 역사를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단군이 신화이고 실존의 인물이 아니라고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의 흉계에 의해서다. 단군을 최초로 부정한 인물은 일본인 사학자 백조고길(白鳥庫吉)이다.그는 1894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을 써서 단군의 역사를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스러운 선담(仙譚)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여 단군 역사를 왜곡하는 뿌리를 이루었다.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철저하게 왜곡시킨 자는 '조선사 편수회'에 참여했던 금서룡이다. 그는 1903년 동경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도제대 교수로 있었는데 1921년 '檀君考'라는 논문을 써서 경도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근대 조선인 사이에는 갑작스러운 단군을 숭봉존신하는 바람이 일고 있어서 단군을 조선 민족의 국조신으로 믿는 '단군교' 또는 '대종교'라는 교도까지 생겨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사태 때문에 논문을 서둘러 발표한다고 까지 하였다.

 

단군의 부정은 철저한 식민주의 사학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안타깝게도 조국 광복의 50년을 지내면서도 식민사학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인(日人)이 우리 민족을 영구히 지배하고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 위하여 국조를 부정하고 상고사를 부정한 식민사학의 잔재가 지금까지 횡횡하는 것은 왜놈보다도 더 무지하고 정신 못 차린 '조선왜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음을 생각할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2.

 

단군은 우리민족의 국조로서 고조선의 건국자이다.

 

고조선은 BC 2333년부터 BC 238년까지 2096년간 47명의 단군에 의해 지속된 한민족 최대의 전성시기였다. 우리가 '단군왕검' 이라 할 때 단군은 천제(天帝), 천왕(天王), 천군(天君)의 의미이다. 우리의 옛말에 하늘(天)을 "단" 혹은 "당"이라 하였고, 君은 통치자의 뜻이다. 왕검은 두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왕검이라 부르는 것은 관경지장(管境之長)을 일컫는 말로 이두법에 王은 大의 뜻이고 儉은 醫의 뜻으로 '대의(大醫)'란 말인데 여러 지역마다 각각 왕검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면 여러 왕검 가운데 구환족(九桓族)을 통일(統一)하고 삼한관경(三韓管境)을 실시한 고조선의 초대 단군을 일컫는 말이된다. 환단고기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초대 단군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배달국의 13세 사와나(斯瓦羅) 환웅의 초기에 웅녀君의 후예를 여(黎)라고 불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 홀빈 - 忽濱, 지금의 하얼빈)에 봉토(흙을 쌓아 올림)를 얻어 왕검이 되었다. 이분께서 덕을 쌓고 백성들을 사랑하니 땅이 점차로 확대되고 여러 지역의 왕검들이 다와서 방물(方物, 감사나 수령이 임금에게 바치던 그 고장의 산물)을 올렸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이 넘게 되었다.이로부터 460년이 지나 신인왕검(神人王儉)께서 출세(出世)하시니, 이 분이 삼한(三韓)을 통일하신 단군 왕검이시다.

 

초대 단군 왕검께서는 기원전 2370년(辛卯年) 5월 2일 인시에 단수하(檀樹下)에서 태어나시니, 신인지덕(神人之德)이 있어 원근의 사람들의 외복(畏服, 두려워 복종함)하였다. 14살에 웅씨국의 비왕(裨王)이 되시어 대읍국(大邑國)의 일을 다스리셨고, 39세 되시던 무진년(BC 2333년) 웅씨王이 전쟁에서 돌아가시자, 그 지위를 계승하시고 10월 3일 무리 800명을 거느리시고 박달나무가 우거진 소도에 이르러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수도를 아사달에 세우셨으며,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신시(神市)의 옛 법도를 회복하시고, 8조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교화하셨으며, 팽우(彭虞), 성조(成造), 신지(臣智), 기성(奇省), 나을(羅乙), 회, 우(尤), 고시(高矢) 등의 신하의 보필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시고, 비서갑(지금의 하얼빈), 하백(河伯)의 따님을 맞이하여 왕비를 삼으시고 누에를 치게 하시니 덕화(德化)가 사방에 푹 젖어들게 되었다. 집일함삼(執一含三)하고 회삼귀일(會三歸一)하는 삼신일체의 원리를 따라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실히하여 인(人)에 응하는 진한(辰韓)은 지금의 하얼빈에 도읍하여 단군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천(天)에 응하는 마한(馬韓)은 지금의 평양에 도읍하여 부단군 웅백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시고, 지(地)에 응하는 번한(番韓)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에 도읍하여 부단군 치두남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였다. 87세 되시던 정사년에 대홍수가 범람하자 풍백팽우(風伯彭虞)에게 명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하시고, 88세 되시던 무오년(BC 2283년)에는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강남의 민정 8,600명을 동원하여 삼람城을 강화도에 쌓고 마니산에다 제천단을 쌓으셨으며, 91세 되시던 신유년에는 친히 마니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104세 되시던 갑술년에는 태자 부루(扶婁)를 중국 철강성의 회계산에 보내 우사공(虞司空)인 우(禹)에게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을 전하여 홍수를 다시리도록 하셨다.130세 되시던 BC 2241년 경자년 3월 15일에 돌아가셨고 낙빈 왕비와의 사이에 부루, 부소, 부의, 부여의 4子를 두셨다고 전한다.단군 왕검께서 돌아가시자 만백성은 부모님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모여 앉아 경배하여 항상 생각하여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역대의 단군은 환인천제, 환웅천황과 초대 단군성조를 삼성사에 모셔 숭배지례(崇拜之禮)가 영세불체(永世不替)하였다.

 

 

3.

 

단군의 영정을 그려 세상에 널리 전한 사람으로는 신라 진흥황 때의 솔거가 유명하다. 그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황룡사에 벽에 노송도를 그렸더니 많은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벽에 부뿹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거니와, 동사유고를 보면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열중하였으나 벽촌에 스승이 없어 천신에게 가르침을 청했더니 어느날 꿈에 단군으로부터 천필(天筆)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에 감격하여 꿈속에서 보았던 단군의 화상을 1000여 폭 이상을 그려 세상에 널리 보급하였다고 한다. 지난 1995년 11월 증산도 개벽대치성때 복원한 단군의 어진은 해남에 있는 단군의 영정을 중심으로 새롭게 복원한 어진이다. 해남에 단군의 어진이 모셔지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해남에서 태어난 '이종철'이라는 분이 서울의 휘문 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로 수학 여행을 갔다가 삼성사의 사당을 가보니 건물이 넘어질 듯 다 허물어져 있고 관리자도 없어 당시 인솔교사인 '김홍암'이라는 분과 함께 영정, 제기, 솔 등을 몰려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해남에다가 단군전을 짓고 모셨다고 한다. 현진건의 단군 성조 순례기를 보면 일제는 1911년 황해도 구월산의 단군사당을 강제 철거하고 공매에 붙여 헐어 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이종철 씨가 구월산의 단군영정을 모셔 온 것은 191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해남에 보존되어 있는 구월산의 단군 영정을 보면 그 근엄한 자태와 성스러운 얼굴모습은 수천 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고조선의 시대로 날아가게 하는 신비가 있다. 아마 이 영정은 비록 솔거의 친필은 아니고 두세 번 개사된 모습이겠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찬탄케 하는 위엄이 남아 있다.

 

끝으로 단군어진 복원의 의의를 몇가지 기술해 보고자 한다.

 

첫째, 단군의 진면목의 복원은 우리의 잃어 버렸던 단군의 역사가 다시 새롭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으며,

 

둘째, 단군 성조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 시대의 우리 민족의 종교, 사상, 철학, 문화가 새롭게 전개되어 주체성을 잃어 버리고 방황하는 우리 민족에게 분명한 이정표를 제시하여 줄 것이다.

 

셋째, 단군 시대 때 우리 민족은 동아시아의 패주(覇主)로서 역사를 선도하였듯이,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우리 민족이 세계에 우뚝서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이제까지 못난 후손의 부끄러움을 다 털어버리고, 단군 성조 어진 복원과 더불어 우리의 뿌리를 찾고 자긍심을 회복하여 세계속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윤창열(대전대학교 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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