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고대사, 어떻게 왜곡되었나?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09 13:10:53    조회: 1,577회    댓글: 0

한민족의 고대사, 어떻게 왜곡되었나?

*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의 한족(漢族)과 일본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고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道典 1:1:6) 

『증산도 도전』은 우리 민족의 뿌리역사의 왜곡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을 흔히 배달민족이라 하고, 반만년 역사를 자랑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10월 3일이 개천절이라는 것은 알아도, 국조 단군에 대해서는 막연히 '단군신화'로만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도 서점에 가보면, '단군신화' 운운하는 책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한 세 가지 해독


불과 수년 전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단군상 훼손사건은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0여 년 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단군신화를 「근거있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32%(1992년 10월6일자 세계일보)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뿌리를 알지 못하고 역사의식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10월 3일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으면서도 국조 단군의 역사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는 1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치유하려면 특히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반성하고, 민족주체성에 입각해 바른 역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동 신문기사) 

민족사학자들은 이 삼독의 피해에 대해 대동소이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위 중독과 왜독과 양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 민족 역사의 뿌리를 잃어버리게 한 그 사례를 찾아본다. 

 

중독(中毒): 사대주의 역사관


서기 650년부터 신라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빌어다 썼다. 통일신라 때에도 당나라의 연호를 썼음은 물론이다. 그후 고려시대는 송나라의 연호를, 조선시대에 와서는 명나라, 청나라의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역사를 쓰는 학자들이 아(我)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다. 

중국을 대중화로 삼고 우리나라를 스스로 소중화로 비하시켜 보는 것이 바로 사대주의 역사관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로서 삼국시대의 정사를 기록한 「삼국사기」(1145년)가 역대 최고의 사대주의 사서로 꼽힌다. 

고려 중기때 사람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으며 그후 삼국사기를 쓰게 되는데,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불손하여,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이 부분은 누가 보아도 중국에 편중된 역사 서술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삼국사기에 보면 "진덕왕 3년(649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모든 관직이나 명칭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복장제도를 중국같이 바꿔 버렸다.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한국인의 가치관과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오직 중국에서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정신의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고려 후기 때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1281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한 구절에 '석유환국'(昔有桓L: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에 대해 주를 달면서 환국과 불교의 환인이 글자가 비슷해 보이므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국가가 아닌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帝釋天, 釋帝桓因陀羅, Sakra-Devendra)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강산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고기(古記)」 원문에 없는 말을 제멋대로 갖다붙인 것이다.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단군왕검의 도읍지 아사달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과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민족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단군고기)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인용하여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또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고려시대 때 이러했다면,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서거정의 『동국통감』도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다루지 못했으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우리나라 역사를 '기자'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당시에는 유림들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감히 드러내놓고 주체적인 역사를 논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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