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 천주님이 동양의 상제님과 동일한 분이다
상제님의 일등비서, 리치 신부
서교의 마테오리치 신부는 신명계에서 어떤 분이냐 하면, 리치 신부가 예수 신도지만 공자보다도 우수한 분이고, 부처보다도 나은 분이고, 예수보다
몇 백배 훌륭한 분이다. 역사적인 성자들은 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리치 신부는 죽어서도 인간들을 위해 무슨 방법이 없나 하고 저
별나라까지 쫓아다니면서, 그곳의 문명이기를 받아내려 사람들에게 일러 주었다. 이렇게 참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러고는 하다하다 할 수 없으니까
동서양 신성불보살을 전부 거느리고 상제님께 달려가서 ‘우리 능력으로는 좋은 세상을 열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상제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에 임어하셔서 세상 사람을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탄원을 했다. 그래 상제님이 “내가 괴롭기는 하지만 리치 신부를 데리고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대순하다가 오직 너희 동토에 그쳐서 미륵불에 30년 동안 명을 붙여 있다가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천명과 신명을 내려 최제우를 내었으나
수운이 천명을 다하지 못하므로 그 명을 거두고 직접 오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셨다. 상제님은 그렇지 않더라도 오실 분이지만, 리치 신부가
그렇게 하소연을 해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이다. 리치 신부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현재 상제님의 1등 비서라고 할 수 있다.
(도기 140년(2010년) 3월 17일 대구 수성도장 태상종도사님 도훈 말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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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만력제 치하인 1582년 중국 남방 포르투갈의 거점지인 마카오에 이립而立(서른)의 나이에 접어든 서양 가톨릭의 한 신부神父가
찾아왔다. 훤칠한 키, 푸른 눈에 큰 종鐘소리와 같은 음성을 지녔고, 신학 철학 법학 천문학 수학 등의 여러 학문을 연마한 고결한 인격을 갖춘
이였다. 동서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장 훌륭한 인물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대성사大聖師였다.
내가 믿는 천주님이 동양의 상제님과 동일한 분이다
서기 1603년 만력 31년 7월 백중이 지난 다음 날, 휘영청 밝은 보름 달빛이 명나라 수도 베이징의 시가지를 교교히 내리비치고 있었다. 50세의
나이에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해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벽안碧眼의 노인은 붓에 먹을 묻혀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오국천주吾國天主는 즉화언상제卽華言上帝니라.
He who is called the Lord of Heaven in my humble country is He who is called Shang-ti(Sovereign
on High) in Chinese.
내 나라에서 천주님이라 불리는 분은 중국에서 상제라 불리는 분이시다.
또 한 구절을 썼다.
역관고서歷觀古書하야 이지상제여천주특이이명야而知上帝與天主特異以名也라.
Having leafed through a great number of ancient books, it is quite clear to me that
the Shang-ti(Sovereign on High) and the Lord of Heaven are different only in name.
수많은 중국 고전을 검토해 본 결과, 상제님과 하느님 아버지이신 천주님은 이름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주1)
이제야 매듭을 짓는구나. 노인은 눈을 들어 창문 밖 달빛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촛불 아래 서문을 작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썼다. 利瑪竇書.
20여 년 전 이 땅(중국)에 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려 한 마테오 리치 대성사였다.
그가 이날 마무리 한 책은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DE Deo Verax Disputatio: 하느님에 관한 참된 논의)이다. 리치 대성사는 동양인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단순히 교리 해설에만 그치지 않고 유불선의 고전을 인용해서 가톨릭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유불선 사상과 가톨릭의 사상을 대비시켜 양자가 서로 배타적인 게 아니고 서로 보완적이라는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처음에는 ‘천학실의天學實義’라고
했다.
이 책의 저본을 수년간 친구들에게 읽혀서 문장을 수정하고 더 완벽한 내용으로 바꾸었으며, 문장 형식도 독자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는 대화체를
택했다. 플라톤의 대화록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천주교 교리가 변증론적으로 구명되어 있다. 이 책을 완성한 리치 대성사의 나이 어언 오십사 세.
얼굴은 주름살로 가득했고 머리와 수염에는 서리가 내렸다. 그는 중국인으로 죽기로 결심하였다.
독행천리에 백절불굴, 일심의 화신
당시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에서 온 상인을 노략질이나 일삼는 ‘야만인’으로 여기고 서양인을 몹시 경계하였다. 여기에 중국인은 오직
자신들만이 온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오만한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 리치 대성사는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승복을 입고 삭발을 감행했다. 이는 일본에서 승려가 존경을 받는다는 발리냐노 주교의 이야기를 듣고 중국도 그러리라고 속단한 결과였다.
리치 대성사는 길에 버려진 병자를 간호하는 등 현지인들을 위해 활동하였고, 이름도 중국식으로 지었다. 이마두利瑪竇. ‘마두瑪竇’는 ‘마테오’의
음사이며, 성은 ‘리치’를 본떠 ‘리利’라 하였다. 이는 벼(禾)를 칼(刀)로 추수한다는 의미와 함께(당연히 가을을 상징한다) 동서양 문화를 통합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서방에서 온 현자’라는 뜻의 ‘서태西泰’라는 별호도 얻게 되었다. 이를 합쳐 ‘리서태마두’, 혹은
‘서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고민에 빠졌다. 즉 인격신 하느님(Deus)을 나타내는 중국어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는 중국인 포교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입교를 희망한 청년이 자신의 집에 조그만 제단을 만들고 벽에 ‘천주天主’라고 써 붙인 것을 보고 무릎을 치며 이를 번역어로
사용하기로 했다. ‘천天’은 천지만물을 주재함을 뜻하고, ‘주主’를 통해서 하느님의 유일신적, 주재신적, 인격신적 개념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때 새로 부임한 신임 총독 유절제劉節齊가 외국인 체류 불허 방침을 내세우면서 이마두 대성사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시켰다.
이 때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다.
“마치 높은 산에서 큰 돌을 굴려 올리다가 정상에 도달할 무렵 돌이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런데 원래 리치 대성사를 추방해 서양식으로 지은 성당과 사제관을 차지하려던 유절제가 이런 행위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해
리치 대성사 일행을 소주韶州에 정착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불승이든 도교의 도사든 모두 우상이나 숭배하고 술수나 부리는 어리석은
이들로 인식되고 있음을 깨달은 이마두 대성사는 예수회 선교사가 유학자와 가장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때부터 전형적인 유자儒者 복장을 하게 되었다.
황제를 만나 정식으로 포교활동을 인정받고 싶던 이마두 대성사는 1595년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조선에 파견할 명군을 거느리고 베이징으로 가던 병부시랑兵部侍郞
석성石星을 알게 되었다. 이때 석성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배가 전복되어 친구인 수련수사 바라다스를 잃고, 자신도 실신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이후 석성과도 헤어져 육로로 어렵게 남경南京(Nanjing)에 도착하였으나 끝내 거주를 허락받지 못했다.
다시 남창南昌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원을 했다.
“하느님 당신이 저의 계획을 아시는데 이 어려운 사업을 왜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계시해 주었다.
“장차 북경과 남경 두 황도에서 너를 도와줄 것이다.”
희망을 안고 도착한 남창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병부시랑 석성의 수행원 가운데 한 의생醫生을 방문한 자리에서 황족인 건안왕建安王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비상한 기억력을 선보이며 우의를 돈독하게 다졌다.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난 즈음, 남경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춘
사대부들의 예방을 받으며 교유하였다. 이곳에서 서양의 과학과 수학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였으며 1600년에는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또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1584년)에 누락됐던 조선朝鮮을 추가하고 중국어로 지명을 표기하여 재판을 내었다. 이 지도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같은 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800km의 물줄기를 거슬러 북경北京(Beijing) 길에 올랐다가 환관 마당馬堂에게 억류되기도 하였다. 당시 환관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세금을 포탈, 횡령하였고 거액의 뇌물을 받기도 했다. 이는 집권자 만력제의 무능과 명 왕조의 쇠락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경에 이른 이마두 대성사는 이곳에서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이지조李之藻(1571~1630: 세례명 레오)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이마두 대성사는 그에게 해시계 등의 제작법을 전해 주었다. 그와 함께 동양의 고전을 서양 언어로 번역하고, 서양의 문명을 동양에 전달하기도
했다. 저술은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20여 권이 넘었으며, 종교, 과학, 수학, 음악(8음계와 피아노의 전신인 클리비코드 연주법), 미술(투시법에
의한 원근법을 적용한 서양화법) 등 전 방위에서 초적극적인 활동으로 동양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서양의 그레고리 역을 번역하였고,
24절기의 날짜를 계절에 맞게 고쳐 ‘시헌력時憲曆’이라고 했다.
하지만
평생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는 마침내 격무를 이기지 못하고 1610년 5월 3일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병상에 눕게 되었다.
중국에 온지 27년 되던 해였다. 긴 여행과 이질적인 풍토로 인해 중병을 많이 앓았고, 포교 사업은 생각만큼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난항을 겪었으며,
숱한 죽음의 위험을 겪었다. 추방되고 억류되고 심지어 도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친형제와 같이 사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들었다.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아 식사를 거르게 되고 과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궁의 어의도 조선의 인삼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5월 11일 오후 6시 지상에서의 천국 건설을 이루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는 결국 상제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향년 58세. 숨을
거둘 때 사람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聖人, 眞是聖人)”이라고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19일, 만력제는 북경성 밖 책란柵欄에
이마두 대성사의 묘지를 하사하였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서양인을 위해 묘지를 하사한 사건으로 비문에는 ‘야소회사리공지묘耶蘇會士利公之墓’라고
적혀 있다. 베이징 부윤 황길사黃吉士는 이마두 대성사의 묘실에 ‘모의입언慕義立言’(의를 숭모하고 저술로써 말씀을 세움)이란 편액을 증여했다.
이마두
대성사는 생전에 유럽의 다양한 자연과학적 지식과 서양 문물 전반을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중국인의 삶과 문명에 기여를 하였고, 동시에 스스로 중국
전통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동서양간의 호혜적이고 우호적인 문화교류의 모델을 확립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동서
문명 사이에 다리를 놓은 ‘최초의 세계인’이자 동양에 개화의 문을 열어 준 선구자로 칭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할 수 있다.